
운전대를 놓으며, 세상을 놓는다
햇살 좋은 오후, 나는 차고에서 십 년 넘은 내 차를 닦는다. 손때 묻은 운전대에는 젊은 날의 내가, 아내와 아이들을 태우고 전국의 산과 바다를 누비던 시절의 웃음소리가 배어있다. 이 차는 단순한 쇳덩어리가 아니었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달려온 나의 성실함이었고, 가장으로서의 든든함이었으며,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령 운전자’. 뉴스에서는 연일 상점으로, 주택으로 돌진하는 끔찍한 사고 소식을 전하며 그 이름 뒤에 ‘위험’, ‘시한폭탄’ 같은 꼬리표를 붙인다. 화면 속의 통계 그래프는 가파르게 치솟는다. 사고 건수 20%, 사망자 수 30%... 차가운 숫자들이 마치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아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나는 아직 괜찮은데. 나는 저들과 다른데.’ 애써 고개를 저어보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은 정직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알고 있다.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차선이 부쩍 흐릿하게 보일 때가 있다. 교차로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한 박자 늦게 출발하기도 한다. 쌩쌩 달리는 젊은이들의 차가 경적을 울리며 스쳐 지나갈 때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주 잠깐, 익숙한 동네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하지?’ 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 아찔한 순간들은, 나만이 아는 쇠락의 징후다.
내 주머니 속 운전면허증은 그저 플라스틱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세상과 연결된 마지막 끈이다. 아침 일찍 병원에 가기 위해 자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자유, 수십 년 지기 친구의 부고에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의리, 가끔은 아내를 태우고 훌쩍 바닷가 횟집에 다녀올 수 있는 낭만. 이 모든 것이 저 작은 플라스틱 안에 담겨있다.
그래서 운전대를 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동 수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자발적 고립을 선언하는 일이며, ‘나는 이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늙은이’라고 인정하는 낙인처럼 느껴진다. 매년 수만 명의 동년배들이 면허를 ‘자진 반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들이 느꼈을 상실감과 고독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들이 반납한 것이 어디 운전면허증뿐이었을까. 아마 평생을 지탱해 온 자존심의 한 조각도 함께 내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선택해야 함을 안다. 나의 ‘자유’가 타인의 ‘일상’을 위협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끔찍한 가능성을 외면할 수 없다. 나의 작은 실수가 한 가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공포는, 내가 느끼는 고립감보다 훨씬 더 무겁고 크다.
오늘, 나는 다시 한번 차를 정성껏 닦는다. 첫 차를 샀던 날, 아이의 입학식에 데려다주던 날, 아내와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났던 날의 기억들을 먼지와 함께 닦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들에게 전화 한 통을 건다. “아들아, 이번 주말에 오거든 이 차 키 좀 가져가라.”
운전대를 놓는 것은 세상을 놓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살아온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한 나의 마지막 운전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길 위를 달리지는 못하지만, 나는 가장으로서, 한 사회의 어른으로서 가장 무겁고 위대한 책임의 핸들을 돌린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